지나 손의 전시회 <疊疊 : 첩첩> 에 즈음하여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는 「순수의 예언(Auguries of Innocence)」이라는 시의 첫 연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모래 한 알에서 세계를 보고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들꽃에서 천국과 만난다.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너는 한 줌의 손에 무한을 움켜쥐고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찰나 속에서 영원을 보리라. And Eternity in an hour
이 시는 1940년대 중국의 예술철학자 종백화(宗白華, 1897-1986)에 의하여 오언율시의 한시체로 번역되었고, 이후 많은 동아시아 사람들이 감화되었다. “일화일세계(一花一世界), 일사일천국(一沙一天國), 군장성무변(君掌盛無邊), 찰나함영겁(刹那含永劫).” 진리에는 동서(東西)가 따로 없고, 깨달음에 고금(古今)은 둘이 아니다.
지나 손(Gina Sohn, 1965-)는 한국을 대표하는 대지 미술 작가이다. 지나 손의 대지 미술은 바람이 부는 해변이나 산속의 숲에서 펼쳐진다. 대지(Erde)는 세계(Welt)와 대대적(對待的) 관계에 있다. 가령, 우리는 빈 종이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연필이나 볼펜으로 무언가를 적거나 그려야 읽을 수 있다. 빛만이 가득할 때, 우리는 빛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어둠이 있어야 빛의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의 대표작 「롱샹 순례자 성당(Notre-Dame du Haut)」의 어둠에 휩싸인 내부는 빛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작은 창문들로 달려오는 햇빛의 굵은 알갱이는 어두운 내부의 그림자와 완벽하게 한 몸이 되기 때문이다.
지나 손은 대지를 세계에 대비시켜 그 둘의 본질이 드러나게 한다. 대지는 세계를 품는 어머니이다. 반면에 세계는 대지를 흔드는 아버지이다. 이 둘은 싸운다. 그러나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지나 손은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보이게 만든다. 연막을 펼쳐서 바람의 질주를 현시한다. 또한, 지나 손은 바다의 파랑과 포말을 화면에 담는다. 어째서일까? 물은 근원(根源)이기 때문이다. 바람은 시공(時空)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12세기를 살다간 위대한 페르시아 시인 오마르 하이얌(Omar Khayyam, 1048-1131)도 인식을 함께한다. 오마르 하이얌은 「루바이야트(Rubaiyat)」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내가 심은 지혜의 씨앗으로 With the Seed of Wisdom did I sow,
또한, 나의 노고로 그들을 자라게 하여 And with my own hand labour'd it to grow:
잘 익은 곡식의 수확이 있게 되리라. And this was all the Harvest that I reap'd
그리고 나는 물처럼 와서 바람처럼 떠날 것이다. I came like Water, and like Wind I go.
지나 손은 대지에서 일어난 일을 현대의 연극과 무용의 장치를 통하여 상징으로 표현한다. 상징은 고대 그리스어 ‘sumballein’에서 온 것이다. ‘sumballein’은 함께 불러내는 것이다. 수많은 의미를 부른다는 뜻이다. 숨은 의미를 소환하는 것이다. 지나 손이 「연기를 풀다」라는 대지 설치미술에서 여섯 퍼포머가 검은 연기를 허공에 펼친다. 빛이 어둠을 통해 현시되듯이, 우리는 연기를 통해서 바람이 떠나는 곳을 보게 된다. 허공에서의 드로잉은 시공에 대한 물음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은 도가에서 말하는 도(道)와 유가에서 말하는 천(天)과 같다. 그것은 비어있는 허무(虛無, nihil)가 아니라, 만상(萬象)의 원천이자 만동(萬動)의 근본이다. 비어있다는 것은 텅 빈 충색이다. 우리는 비어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 형(形)의 완성은 기(氣)의 쇠퇴와 같은 말이듯이, 거꾸로 비어있다는 것은 에너지의 충색(充塞)을 뜻한다. 지나 손이 표현하는 공간은 우리의 근원이자 생명체험으로 가득한 삶의 충만을 뜻한다. 따라서 작가는 이러한 경험을 ‘첩첩(疊疊)’이라고 부른다. ‘疊’은 ‘거듭되다’는 뜻도 있거니와 ‘접힌다(屈)’라는 뜻도 있다. 그런가 하면 ‘울리다(振作)’라는 뜻도 있고, ‘마음에 품다(懷)’는 뜻이 있는가 하면, ‘밝히다(明)’라는 뜻도 있다. 결국, 우리는 시공의 일부분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시공은 불가사의하다. 그것은 텅 빈 것처럼 보이지만,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불가사의한 그 무엇으로 언어를 초월한다. 따라서 이러한 불가사의를 괴테(Johan von Goethe)는 「물의 정령에 관한 노래(Gesang der Geister über den Wassern)」에서 “인간의 영혼, 너는 물 위에 있는 것만 같고, 인간의 행운, 너는 바람에 있는 것 같다(Spirit of man, Thou art like unto water! Fortune of man, Thou art like unto wind!)”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대지와 세계의 대결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예술작품의 기원」에서 제기한 철학 의제이지만, 지나 손의 작품 해석에서도 유의미하다. 작가의 2021년작 「바람ㆍ물ㆍ기와」에서 지나 손 작가는 바닷가에 기와를 늘어놓아 집을 연상시키는 형상을 설치했다. 모래는 바다에 이끌려 기와에 부딪히며 기와가 가리키는 집의 형상은 차츰 바닷물에 잠긴다. 바람은 터있는[疏] 허공을 질주하며 질주하는 바람에 바닷물은 자유를 만끽하여 대지와 기와를 건든다. 기와는 물에 잠기지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세계가 열린다는 것은 대지가 닫힌다는 뜻이다. 반대로 시간을 통해서 대지는 세계를 마멸시킨다. 세계는 도구를 통하여 다시 대지를 닫는다. 한자에 원수 ‘구(仇)’ 자가 있다. 그런데 ‘원수’를 뜻하는 동시에 ‘반려자[侶]’를 뜻하기도 한다. 나의 아내는 나의 반려인 동시에 나의 원수이기도 하다. 빛은 어둠의 원수인 동시에 그것의 짝이기도 하다. 불은 달아나려고 하고 장작은 불을 끌어당기고자 한다. 그러나 장작이 소진되면 불의 생명도 끝난다. 둘은 원수이면서 짝이다. 지나 손은 우리의 세계(문명)과 자연의 진행 방향을 극화시킨 것이다. 역경(易經)은 모든 지상의 사태는 여섯 개의 단계를 거쳐서 마무리된다고 설명한다. 모든 사건에는 결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도 단계를 거치며 자연의 진행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물과 사건에는 결이 있다. 그 결은 방향성이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이치[理]라고도 하며 도리[道]라고 부르기도 한다. 「허공을 드로잉하다(Drawing in the Air Smoke)」에서 퍼포머가 여섯 사람으로 설정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지나 손 작가는 올해 자하미술관에서 「The Color of Summer」라는 설치 퍼포먼스 작업에서 파브릭을 이용해서 대지 미술의 진수를 보여준 적이 있다. 이 역시 대지와 세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특히 생명과 의미로 가득한 대지, 그리고 세계를 대변하는 예술작품의 충만함을 극적으로 대비시켜서, 대지와 세계 사이에서 펼쳐지는 무한한 충돌을 현시했다. 그러나 충돌은 비단 대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충돌 속에서 최상급의 화해가 표현된다. 우리는 다시금 원수 구(仇)의 의미를 상기해야 한다. 원수는 나의 짝이다. 우리는 대지의 저항과 시공의 텅 빔 덕분에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나 손 작가에게는 더 놀라운 점이 있다.
회화가로서의 지나 손의 역량이 바로 그것이다. 지나 손의 회화는 대지와 미술관과의 관계, 즉 자연의 생명체험과 미술사에 축적된 역사적 선례 사이에서 끝없는 길항(拮抗)과 조화를 꾀한다. 길항이라 함은 그간 존재했던 회화형식을 초탈하려는 작가로서의 분투를 뜻한다. 조화라고 말한 것은 자연에서 느끼는 미적 체험과 미술관에서의 미적 체험이 서로 유리되어 부유(浮游)되고 마는 최근 미술의 현실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작가는 절실하고 솔직하게 펼친다는 뜻이다. 우리는 「⽉下雪運(Reflection of Snow by Moon): Nr. 1008」이라는 회화작품이 지닌 비형상적 회화의 에너지를 기억한다. 작가는 대상을 가리키지 않고 작가의 기운만으로 회화적 회화(painterly painting)를 구축하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고 있다. 우리는 달빛이 눈으로 덮인 온 세계를 밝히는 적막감을 기운생동한 작가의 필치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강렬한 필치는 고요 속으로 수렴되며, 반대로 고요로부터 생명감이 사방으로 진동한다. 이번 갤러리 X2에서 펼쳐지는 ≪疊疊≫에서의 회화 신작 또한 새로운 의미로 충만해있다. 블랙 연작에서 표면의 물질감은 지상에서의 품위(earthly decency)와 천상에서의 존엄(celestial honor)이 서로 부유하지 않고 일체화된다. 작가는 우리의 감각에 포착되지 않는 시공의 본질을 다룬 가사(可思)의 세계를 펼친 듯하며, 그에 호응하여 우리는 그림 그 자체(painting itself)를 나타내기 위해 작가가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고 느낀다. 그 그림은 물질의 견고함으로 응결되었지만, 또한 물결의 진퇴(進退)로 인한 소리의 울림으로 우리를 안내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19세기 영국의 대시인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 1822-1888)의 「도버의 해변(Dover Beach)」의 시구가 의미하는 바와 지나 손의 예술세계가 이끄는 힘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신앙의 바다는
역시 한때 만조가 되어 대륙의 해변을 따라
밝게 빛나는 감아올린 띠의 주름처럼 놓여 있었네.
하지만 지금 내가 듣는 것은 오직
밀려가는 길고 우울한 파도 소리뿐,
밤바람의 살랑거림에,
이 세상의 광막하고 황량한 변방,
조약돌이 드러난 해변을 따라서.
그리고 매슈 아널드는 다음 연에서 “아, 사랑하는 그대여, 우리 진실해져요. 서로에게!”2)라고 말한다. 결국, 대자연의 숭고와 그 이면에 내재한 조화에 대한 경탄과 신의 섭리에 대한 경의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확인되는 사랑에서 그 의미가 극화되기 때문이다. 지나 손의 작품은 대지(우주)와 세계(문명)에 대한 서사를 유감없이 발산하지만, 그 최후에 말하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와 하늘과 사람 사이의 관계, 즉 신뢰와 사랑에 관한 것이다. 작가의 모든 작품 속에 그러한 상징이 내재한다. 따라서 지나 손의 회화 작품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소이불간(疏而不簡),간이불소(簡而不少).”라고 말할 수 있다. “성긴 것만 같지만 간단치가 않고, 간단한 것 같지만 작지가 않다.” 그것이 동아시아 회화의 진수이다.
이진명, 미술비평ㆍ철학박사
1) Roger Scruton, A Political Philosophy: Arguments for Conservatism(London: Bloomsbury, 2006), p. 132에서 재인용: “The Sea of Faith/ Was once, too, at the full, and round earth’s shore/ Lay like the folds of a bright girdle furled./ But now I only hear/ Its melancholy, long, withdrawing roar,/ Retreating, to the breath/ Of the night-wind, down the vast edges drear/ And naked shingles of the world.”
2) 위의 책, p. 132.: “Ah, love, let us be true/ To one ano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