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RAVELER 공감여행기
서태지의 <소격동> 앨범과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국내 1세대 컨셉 아티스트라는 타이틀은 《JAMSAN : The traveler of dimension》에서 잠시 잊어도 좋다. 소녀 캐릭터와 Red Chair를 ‘장미꽃-선인장-파란 집’처럼 ‘아이러니 퍼즐’로 연결한 잠산 만의 세계관은 ‘Surreal Fantasy’라는 진화된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을 보여준다. ‘잠자는 산(잠산)’에서 기지개를 켜는 이번 전시는 문학적 서사와 회화적 표현 사이를 넘나들며 “서구 고전을 선(獲)을 모티브로 한 K-painting”으로 연결한다. 최근 작가의 유화 작업은 완성도를 더한 숙련미를 바탕으로, 작은 작품 하나에도 ‘강렬한 상징화와 지극한 현실 인식’을 종합한 에너지를 보여준다. 이질적 요소의 낯선 만남을 선택하되, 명확한 캐릭터 설정을 통해 ‘흡입력 있는 메시지’를 남기는 탁월함은 잠산 작가만이 취할 수 있는 디렉팅의 방식이다. 작가의 시선에서 생텍쥐페리(Saint-Exupéry, 1900~1944)의 어린 왕자는 결코 친절하지 않다. 잠산은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관계 맺기(인사이드) 미학을 아웃사이드로 전환함으로써, 초현실주의가 추구한 진짜 진실을 파고드는 것이다.
잠산의 감성에 공감한다면, 이제 소녀로 변신한 장미 이야기에 눈을 맞춰보자.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초현실적 판타지를 ‘Recovery Painting’으로 풀어낸 작가는 욕망 가득한 현실 속 공허를 ‘아이러니한 매력’으로 풀어낸다. 별을 여행하는 장미 소녀에게 어린 왕자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니다. 이별마저 공감으로 승화한 탓에 아픔은 이내 성장이 되었다. 작가는 자전적 에세이 <별에서 온 장미>에서 특별하게 빛나던 별은 사라지고, 가시 같던 아픔은 작품 속에서 무화(無化) 되는 회복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소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름다운 판타지’가 잠자던 감성을 깨워 욕망(레드 체어: Desire of desire) 너머의 자유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다.
공허한 공감, "Surreal Fantasy“
위기는 예술을 일깨운다.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를 쓴 시기는 초현실주의 작품이 유행한 2차 세계 대전과 연결된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비행사였던 작가는 2차 세계 대전 중 상업이 극도로 발달한 미국에서 꿈을 꾸는 듯한 자전적 에세이를 발표한다. 1935년 비행 도중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했다가 기적적으로 구출된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잠산 작가 역시 상업주의의 끝을 맛본 작가이다. 상업은 대중을 호도한다. 하지만 순수는 상업을 파고든다. 코로나 이후 가(假) 수면 상태에 처한 우리의 위기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종합한 또 다른 가상세계를 열었다. 미술시장의 호황, 빈익빈 부익부의 창출, 비현실 같은 현실을 이끈 당시의 욕망은 ‘제재된 세상(Remade World)’ 속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어찌 보면 잠산 작가의 소녀 시리즈는 지난 세기 생텍쥐페리가 상상한 현실을 진일보시킨 ‘포스트 초현실주의(Post-surrealism)’가 아닐까 한다.
무의식과 꿈의 판타지를 종합한 잠산의 작품은 시대와 개인의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드러내도록 유도하는 솔직한 매개체이다. 작가는 솔직한 감성을 직관화 한 환상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상업미술에서는 찾기 힘든 세밀한 선을 사용한다. 유화를 고집하며 자신의 오늘을 넘어서는 이유 역시, 현실을 직면하면서 순수한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하나의 화면 안에 ‘욕망(레드 체어)’과 순수(장미 소녀)‘라는 이율배반적 캐릭터를 배치함으로써 빙산처럼 수중에 가려져 있던 무의식의 영역을 드러내는 것이다. 작가는 밝음과 어둠이라는 이분법적 체계를 다원화하기 위해 여러 상징물로의 확장을 시도한다. 자아의 확대를 지극히 아름다운 낭만적 요소로 그려내는가 하면, 아픔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노출 방식으로 통해 ‘극과 극을 넘나드는 아이러니한 형식주의’를 창출하는 것이다. 레드 체어에 앉은 소녀의 표정은 시무룩하다. 선인장을 품에 안고 예쁜 장미를 내려놓은 설정은 지극한 아픔을 드러낸다. 작가는 마이너한 감성들에 정면 도전하면서 ‘리커버리 페인팅’, 이른바 나를 어루만지는 그림을 선사한다. 대중문화와 순수회화의 경계를 신 감각으로 녹여낸 까닭은 ‘미술의 엘리트화 혹은 아카데미즘’이 가진 잔혹성 때문이다. 실제 작가에게 회화란 의도된 자괴감에서 벗어난, 유희할 수 있는 나만의 소통언어를 찾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우리들의 보편성으로 만들어가는 것, 이해 가능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회화와 연동할 수 있는 가장 잠산다운 시선을 모색하는 것이다.
한국화의 선(劃), 잠산의 드로잉과 만나다.
작가에게 선은 공허함을 공감하게 하는 매개체이다. 감성적으로 전달되는 ‘동시대적 영역 그림’은 잠산 만의 개성화 과정을 통해 단순한 캐릭터로 변신한다. 이전까지 어둠과 덜 정제된 느낌들을 솔직하게 표현했다면, 최근 물성에 대한 장악이 가능해지면서 명화에서의 에너지와 도시의 세련됨을 동시에 구현하는 방식을 모색 중이다. 학창 시절 한국화를 접했던 작가는 동양적인 모티브(형식)와 몽환적 판타지(내용)를 어떻게 대중적 메시지로 옮길 것인가를 고민한다. 작가의 레드가 화려함을 대변하는 상징이라면, 하이라이트가 거세된 눈과 무표정한 소녀는 감성을 읽는 우리 모두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두터운 유화의 물성에 표현이 어려운 선을 대치시키면서, 재료의 다름 사이에 숨겨진 ‘차이의 언어’를 끌어낸다. 이는 보편화된 소녀를 통해 다양한 ‘감성의 덩어리’들이 대치(對峙; 서로 맞서서 버티는 상황)되는 역설과 연결된다. 장미 소녀는 곧 사라질 사과별에서 어쩔 수 없는 여행을 시작하고, 아픔을 의인화한 선인장은 순수를 조롱하듯 외로운 공허를 보여준다. 25년의 그래픽 작업에서 터득한 색의 대치 방식은 장미와 선인장의 상징화처럼, 난색과 한색의 대조/여백과 대상의 확장 속에서 잠산 만의 세계관을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작가는 밤이 오히려 낮보다 솔직하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편안함을 주는 보편화된 소녀는 여러 감성을 일깨우기 위한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하면서,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오늘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살아있는 최고의 지성인 지젝(Slavoj zizek, 1949~)은 저서 『비스듬히 바라보기"(looking awry)』에서 응시(凝視, gaze)란 추상적 쾌락의 흔적인 ‘충동(Trieb, drive)’이며, 자기 응시를 통해 상처를 치유할 때 진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대와 개인의 아픔을 등한시(等閑視: 소홀하게 보아 넘김)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잠산의 동화 같은 드로잉은 ‘치열한 현실인식’을 향한 우리 모두를 위한 시선 맞추기라고 할 수 있다.
잠산, 〈별에서 온 장미>
별은 사라진다.
한때는 특별했던, 한때는 빛났던
별들은 사라지고 지워지고 멀어져 간다.
별들은 나에게 말했어 넌 다르다고
넌 소중하고 특별한 의미라고 했지
모든 밤하늘의 별들은 사라진다
그렇게 모든 특별함은 사라진다
사라지는 아픔은 빨간색으로,
지워지는 아픔은 꽃잎으로
멀어지는 아픔은 가시가 되고
내가 장미로 태어나 처음 뿌리 내렸던 그 별은
빨간 사과와 같이 탐스러운 별이었지만
이젠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처럼
나의 뿌리를 흔들며 사라졌던 별들처럼 흘러내린다.
사라지는 별들의 아픔은 초록색의 가시가 돋아있는
선인장이 되어 내 품속으로 들어왔고
우린 함께 소중한 곳으로, 미지의 곳으로
과거로, 현재로, 또 다른 어딘가로
별을 여행하는 여행자가 되었지
더 이상 특별함은 존재하지 않는
사라지는 별들의 끝에서
우린 서로의 눈을 마주한다.
안현정, 미술평론가ㆍ예술철학박사